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서울2001

제주환경 이야기

by 금강력사 2018. 8. 26. 09:45

본문



 제대로된 상경을 한 시점은 2001년 이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대학을 공식적으로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기 전까지 내 생활권은 강북을 통 넘지 못했다. 교통편 때문에 더 힘들었을 것이다. 청계천에 고가도로 아래로 버스가 달렸었고, 신박한 대중교통 환승 시스템이 도입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러다보니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할때는 버스 노선을 잘 골라 한번 승차로 쇼부를 보는 것이 무조건 최선이었다. 당시 등교하던 대학은 상도동에 있었는데, 불행히도 북한산 입구 세검정에서 학교까지 한번에 가는 버스 노선은 없었기에 버스-지하철-지하철 환승을 해야만 통학이 가능했다. 초중고 시절 자전거 통학만 해오던 내게는 고문 같은 노력이며, 시간이었다. 

 그러다가 서울역 뒤에 있는 입시학원으로 등교지를 옮겼고, 결국 인근 작은 고시원으로 거주지도 옮겼다. 서울역 역사(驛舍)는 일제시대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주변에는 노숙자 형님들이 서울역을 포위하듯 둘러싸고 생활하고 계셨다. 충정로에 인접한 고시원에서 서울역까지의 할램을 방불케 하던 거리 풍경의 험함은 꽤 즐길만 했다. 가끔 멀리 진출할 때는 시청까지 덕수궁까지 가기도 했는데 까만 양복의 직장인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고, 왠지 도시 어른들의 놀이 공간을 침범하는데서 오는 묘한 즐거움도 느꼈던 것 같다.

 2002년은 월드컵의 해이다. 빨간옷을 입은 사람들은 끝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 노원역 지하철 고가 아래는 붉은색 잡화들로 난장판이었다. 자동차 트렁크에 타고 태극기를 흔들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면 시청앞, 그리고 광화문 광장 등의 응원 인파는 상당히 조직적으로 흥분을 표출했었는데, 이 곳에 모인 붉은 사람들은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 이후 시청앞 광장에 사람들이 전과 다른 규모로 모였고, 광장에서 집단 행동을 할 때의 쾌감을 맛 봐서 인지 건수만 생기면 사람들은 모였다. 물론 나도 모였다. 그 이전부터 시청앞과 광화문은 서울 시민들이 모이기 좋은 장소였으나, 2002년은 본격적으로 시민의 광장으로 바뀐 시점이 아닐까 싶다.

 1980~90년대에 내 머리속의 서울은 환상 미래 속의 도시였다. 63빌딩이 있고, 땅속을 달리는 지하철이 있는 곳. 반면 서울에서 주로 보게 되는 것은 조선에서 일제를 거쳐 산업화의 역사까지 간직한 사대문 안의 거리들이었다. 주로 머물렀던 친척 어른댁은 일제시대 목조 주택이었고, 시내를 나오면 일본식 건물 빵집에서 빵을 먹고 차를 마시고(어른들은), 근처 몇 층짜리 목조 건물 서점에서 책을 구경했었다. 서울 구경에서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 쇼핑은 제일 흥분되는 일이었는데 어마어마한 물재에 압도 되어서 더 흥분 되었던 것 같다. 탐구활동을 위해 조선백자와 고려청자를 보러 갔던 국립박물관은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다.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어린아이 발걸음으로는 그 건물의 반정도 밖에 못 봤다. 총독부 건물의 위세 때문이었는지 경복궁과 청와대에 대한 기억은 크게 남아있지 않다.

 다시 2000년대로 돌아와서, 일제시대 나무 건물들은 거의 없어졌고, 물론 조선총독부건물도 없어졌다. 종로 거리는 김떡순(김밥, 떡볶이, 순대)을 파는 가판이 대로변을 차지 했고, 목조 건물들 대신 주로 영어 학원들로 채워진 큰 건물들이 드러섰다. 그 뒷길은 북쪽으로는 아기자기한 한식 먹거리를 터프하게 팔아주는 피맛골, 남쪽으로는 뭐라 불리는 거리였는지 모르겠지만 기타 술집과 음식점들이 가득했다. 인사동이 외국인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거리라고 불리면서 옛스러움을 간직했다고 했지만, 그 보다 나에게 종로는 결국 김떡순과 피맛골 그리고 술이었다.  

 서울 2001년 부터 2003년까지 나의 거처였던 세검정은 지하철 이용이 꽤나 제한되는 곳이었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은 경복궁역인데, 집에서 역까지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이 15분 정도 소요된다. 그래서인지 2001~3년 경복궁역 근처 지리에는 꽤나 익숙해 졌다. 요즘 걸핏하면 티비에 나오는 통인동, 통의동, 효자동은 중요한 버스 환승 장소였다. 통인동 등에서는 집에 들어가기 전 간단히 장을 보는 정도로 이용했었었다. 통의동에서부터 효자동을 가로지르는 좁고 나즈막한 골목 산책은 약속 없는 금요일 저녁 귀가길도 꽤 낭만적으로 만들어주었다. 컨디션이 좋고 기분이 좋은 날은 북악스카이웨이를 넘어 세검정까지 산책도 가능했었다. 물론 뉴욕 소호 거리에서 볼만한 모던한 북카페나 런던 어딘가에 있을만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이 거리에 없었다. 경복궁역 일대를 드나들 때 나를 가장 신나게 했던 먹거리는 아메리칸 스타일 전통 치킨 버거였다.

 겨울 하루는 먼저 상경한 선배가 삼청동에 멋진 도시락 밥집이 있다고 나를 데려갔었는데, 그 골목이 너무 스잔해서 과연 이런 곳에 제대로 된 밥집이나 있을까 걱정하며 골목을 걸었다. 삼청동에서 버스를 타기 위해 시내로 돌아 오는 길은 역시나 컴컴하고 추웠다. 이 심란한 길위에 조그만 이층짜리 카페가 등대처럼 불을 밝히고 있었고, 결국 이끌리듯 들어가 묽은 유자차를 마셨다. 

 2000년대 중반이 되면서 인사동 거리에 찻집들이 전통 찻집의 범주에서 탈피하기 시작했고, 정말 조용한 산책을 위한 길이었던 삼청동 거리가 갑작스럽게 서울 사람들의 발길을 불러모았다. 청계천 복원사업도 끝이났다. 이를 필두로 2000년대 중반부터 서울 도심 거리에 대한 시민들의 새로운 요구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외국물, 특별히 미제 물을 먹은 오렌지 족들이 스포츠카를 동원해 압구정을 중심으로 하는 강남거리를 점령했다면, 이제는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중산층 자녀들이 부상하면서 서울 거리 문화를 주도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도시 풍경을 즐기고 거리를 걷고, 요즘 말로 '힙'한 것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요구들이 서울에 나타났다. 

 


 2000년대 중반 서울 시민들의 요구는 무엇이었을까? (시민들의 도시에 대한 요구를 논하기 전에 이야기 해야 할 부분은 '도시는 시민들의 요구를 반영하는가?'라는 질문을 해야하고, 이 질문과 병행되어야 할 부분은 '서울의 시민정치'인 부분이겠지만,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의 대답은 '예'라고 전제한 다음 이야기를 진행하자.) 앞서 중산층 자녀들이 주도하는 거리 문화를 이야기 하였지만, 딱 집어서 그 요구를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바로 청계천 복원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의 중심에 있지만 중심이 아니었던 '현대 청계천의 역사'의 상징은 의외로 크다.

 고도 산업화를 꿈꾸는 사회에서는 도시의 고가도로는 발전의 상징이었고, 일종의 트로피였다. 마천루를 바라보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허리우드 영화에서 보던 LA의 거대한 고가도로가 서울 한복판에도 있다는 것. 청계천 고가도로를 필두한 자연 지형을 초월하는 도로들를 바라보는 서울 시민의 시선에는 일종의 자부심 같은 것이 있었다. 

 청계천을 '고가도로'로 상징 짓기는 했지만, 사실 청계천 일대인 을지로에서 부터 동대문까지는 서울의 살아있는 2차 산업 현장이다. 고가 철거와 청계천 복원으로 과거의 모습이 많이 상실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인테리어 자제 공장들은 을지로 뒷골목에서 돌아가고 있다. 또 물류까지도 담당하는 3차 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부침이 있기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성업중인 동대문 패션타운은 그 일대 섬유상들이 왕성한 영업이 그 입지를 떠 받치고 있다. 인테리어 업자들은 여전히 을지로 일대에서 좋은 품질의 값싼 상품들을 쇼핑한다. 

 다시 돌아가서, 이랬던 청계천 고가도로는 철거되었고, 지금까지도 영업이 되는 청계천의 산업 현장은 절반 이상이 소멸, 이주 되었다. 왜? 무엇이? 청계천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을까? 나의 가벼운 분석은 이렇다. MB의 과격한 결단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의지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서울시가 국제적인 아름다운 미관을 갖추기를 원했던 시민들의 의지였다.  MB는 그 요구를 읽었고, 서울의 현대화의 상징이었던 청계고가 마저도 철거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후에 MB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단순한 사실에서도 그 요구의 실현이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유추 할 수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가벼운 분석입니다. 살려주세요.)

 나의 서울 2001은 청계고가도로와 함께 막을 내렸다. 그리고 시민들의 요구가 반영되기 시작한 서울 2006이 시작되었다. 아쉽게도 2004년부터 2006년까지 거주지는 연천 전곡리였기에 서울의 변화하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 할 수 없었다. 2006년 서울, 그리고 여전히 강북으로 돌아왔을 때는 사뭇 다른 서울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주환경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 2001'-2  (0) 2018.09.10
서울2006  (0) 2018.09.05
제주 환경 이야기 - 새삼스레 화순 금모래해변  (1) 2018.08.1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