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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2006

제주환경 이야기

by 금강력사 2018. 9. 5.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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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완득이 중(나 살던곳 아님 그런데 비슷함)



 2006년 서울 새 보금자리는 풍수지리가 좋은 보문동 옥탑방이었다. 아침 해는 새 원룸건물 덕분에 조금 늦게 뜨고 서쪽은 언덕이라 저녁 햇빛을 피할 수 있었다. 옥탑 마당은 남향이었고 100미터 전방 비슷한 층고에 주택들이 아기자기하게 배치되어 나름 시야도 트여있는 꽤나 탐스러운 보금자리였다. 

 등하교를 위해 매일 오르내렸던 언덕 위에서는 두산타워가 보였다. 두산타워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지만 바로 그 아래는 동대문 일대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버스를 타고 동대문과 이대병원 사이를 지날때는 심야 시간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가 아직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는 것이 맞겠구나'하는 느낌을 줄 정도의 교통혼잡이 항상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 일대는 2010년 즘? 아무튼 거의 버스를 이용하지 않게된 시점까지도 공사중이었다.) 덕분에 종로 시내에서 집으로 돌아갈때 버스 직통 노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스로 이 지점을 지나기가 두려워 지하철을 주로 이용할 정도였다. 아! 이즘, 바로 그 신박한 대중교통 환승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덕분에 깊이가 비교적 얕은 1, 2호선 라인들을 탈때면 환승을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동대문 시장 일대에도 대규모 공사들이 진행되었다. 일찌감치 철거가 예정되었던 아마 야구의 성지 동대문 야구장의 철거가 시작된 시점도 비슷했다. 청계천이 성황리에 팔려나가게 된 사이, 서울의 다른 대규모 재개발 사업들도 시작되었던 것이다. 

 동대문 일대의 교통 혼잡은 이렇다 치고 청계천에서 시작된 재개발은 동서남북으로 퍼져나갔다. 청계천 바로 위 피맛골과 김떡순의 종로 거리도 재개발의 축복에서 자유롭지 못했나보다. 김떡순은 첨단 도시 수도 서울의 중심가에 어울리지 않는 정경 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탑골공원이 시작 되는 지점부터 동대문 지역 까지는 영원히 어르신들의 감성이 지배하는 지역이었다. 지하철역들은 반즘 오픈되어 있는 느낌이라 불법 승하차를 해도 불법인지 본인도 모를 정도였다. 도심 한복판 달동네 같았던 골목들은 또 어떠한가? 생선구이 연기를 피하며 양팔 벌리면 닿을 듯한 골목을 걸어야 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아주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이 도시 정경의 (악세사리, 토핑, 양념 같은 것들....)을 걷어내게 되었다. 


 이상하지만 나는 서울 강북에 대형 재개발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그 즈음부터 종로거리를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같은 시기 대학생 취업률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뉴스를 오르내리기 시작했는데, 그에 뉴스에 발이라도 맞추듯 많은 학생들이 종로의 학원가로 몰려들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런 시대가 종로를 각종 자격증과 검증시험을 위한 학원가로 만들었을까? 그래도 아직 나와 우리는 이런 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덜 되었었나 보다. 종로는 학원만 다니기에는 너무 역사가 깊은 곳이었다. 조선 건국 후 부터 시전 운종가가 있던 곳이 아니었던가. 갓 상경했을때 김떡순을 피하지 못했듯이, 종로3가의 감자탕 맛과 피맛골 각종 안주들을 피하지 못했다.

 묘하게 이때 종로의 작은 골목들을 드나들면서 걷고 앉고 보고 먹고 마시는 행위들이 미래에 소중한 기억을 위한 행위라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추억을 미리 쌓아 두었다고나 할까? 미래 어느 시점에 이런 끄적임을 남길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그 골목 골목들과 먹을 것들 몇 종류 안되는 마실 것들을 머릿속에 착실하게 아로새겼다. 점심, 저녁 매뉴를 먹을 때마저도 굳이 한집건너 한집 찾아가서 먹었다. 이런 기억들이 곧 유산이 될 것임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나 보다. 서울의 이 거리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서울'은 하루아침에 조선 총독부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해 봤기 때문인지, 청계천 복원의 성공을 맛 봤기 때문인지 몰라도, 종로와 동대문일대의 재개발은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한번에 훅훅 들어왔다. 사실 이 시점에 일부 지역을 제외한 종로거리는 도심공동화가 당장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치 낡아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는 않았다. 피맛골은 매일매일 느낌이 달랐다. 하루는 철거의 대상같이 보이던 뒷골목이 어느날에는 사람들로 가득한 운종가의 주막들이었다.

 대부분 대형 도심 개발의 원동력이 그러하듯 서울 2006의 개발 원동력은 돈이었다. 어떤 개발 계획은 돈의 요구가 양보되고 다른 요구들이 과감하게 수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2000년 중반 종로의 재개발 계획은 작은 양보 밖에 얻지 못한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청년 취업률이 뉴스에 오르내리고, 미국의 부동산 부실채권발 세계 금융위기가 찾아오고, 그러던 와중 우리의 요구가 '서울'에 다소 지나치지는 않았는지. 혹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이 순간 '서울'을 보면서 생각해 본다. 정치1번지 종로구의 도심은 다소 파괴적인 재개발 계획이 실행 되었고, 청계천을 복원했던 서울 시장은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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