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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2001'-2

제주환경 이야기

by 금강력사 2018. 9. 10.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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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빵집"

 빵이 유명한 충청도 도시에서 부모님께서 빵집을 운영한다던 유쾌한 대학 동기가 있었다. 우리가 신입생이었던 당시, 나를 포함한 패거리 몇몇이 누가 금메달(시험 빨리 나오기)을 따느냐로 경쟁을 할 정도로 학구열이 낮았던 친구였다. '친구네 빵집이 아주 잘되나보다'하며 서로의 학점 관리 불필요성에 대한 이유를 추측 하곤 했었다. 

 하루(이성간에 뭔가 선물을 하는 14일 중에 그 하루)는 친구에게 '아버지 집에서 케익 만드시느라 바쁜데 지금 학교와서 놀 때냐. 공부도 안할건데 얼른 집에가서 아버지 케익 포장하는 것이라도 도와라.' 며 승질을 긁었다. 나의 가상한 노력에 비해 친구의 반응은 심플했는데 '케익을 얼마나 많이 싸는데 내가 가서 별 도움이냐 되겠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몇개나 싸느냐고 물으니 '만개? 크리스마스엔 2만개?' 이런 대답을 들은 것이었다. '아 알았다. 로컬 빵집 재벌이었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의 빵집 중 하나가 서울에도 브랜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루는 친구가 엄청 짜증을 부리면서 '대기업 빵집 p브랜드가 서울 빵집 건물을 매입해서 결국 자리를 비워주게 생겼다.'라고 했다. '이런 드러운 경우가 실제로 존재하다니...' 그런데 더 재미있는 다른 사실은 그 친구 빵집과 이름이 거의 비슷한 대기업 브랜드와는 사이가 좋다는 것이었다. 이름이 이를테면.... 켄터키프라이드치킨과 켄사스프라이드치킨 같은 그런 관계?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유사 이름의 대기업 빵집과 는 정작 서로 협약을 맺어서 서로의 시장을 크게 침범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1980~90년대 종로 몇몇의 유명 빵집이 있었다. 어른들은 차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서 수다를 떨었고, 아이들은 빵을 고르고 우유와 함께 먹는 재미 덕분에 꽤 오랫동안 어른들의 수다 시간을 참아 줄 수 있었다. 동시대에 소소하게 각자의 성공을 꿈꾸며 동네 빵집들이 큰 부담없이 이웃들에게 각자의 소소한 장점을 뽐내며 각각의 명맥을 유지했다. 

 1990년대 후반 부터는 빵집에도 미국식 프랜차이저라는 개념이 적극 도입되었다. 내가 서울로 진출하기 전 브랜드 빵집이 고향 시골에 먼저 진출했는데, 이 곳에서 맛본 생일 생크림 케익은 충격적일 만치 동네 빵집 케익과 차이가 있었다. 나만 이런 맛의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나 보다. 2000년대 초반은 정말이지 프렌차이저 빵집이 아프리카의 메뚜기 떼 마냥 전국을 점령했는데, 빵집 지형도가 다 바뀌었다. 이때 전설적인 빵집인 종로 고려당, 명동의 뉴욕제과 등등 유수의 빵집들이 패업 내지는 어려운 시기를 거쳤다. 작은 동네 빵집들은 브랜드 빵집으로 간판을 바꿔 다는게 최선의 선택일 정도로 정면  대결은 힘겨워 보였다.




"뽀모도로가 쏘아올린 작은 공"

 당시 대학 신입생은 선배에게 어떤 맛난 밥을 잘 얻어 먹는가가 학교생활 적응과 인맥 형성의 지표였다. 사실 나의 학교 적응과 인맥 형성 점수는 잘쳐줘 봐야 c 정도 여서 특별히 밥을 잘 얻어 먹지는 못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약간의 스트레스가 발생하려던 시점에 소속 학교 선배와는 별개로 고등학교 선배의 성은에 힘입어 신촌에 있는 T페밀리 레스토랑을 갔었다. 신촌에 있는 곳이라 그런지 첫 페밀리 레스토랑 나드리에서 받은 인상은 꽤 신박했었다. 소고기랑 구운 야채를 뜨거운 철판 위에 얹어서 서빙했고, 함께 나온 따듯한 밀 전병(또띠아)에 싸먹는 요리는 꽤 그럴싸 했다. 요즘 말로는(사실은 그때도) 화이타. 이런 당시로서는 이색적인 경험들을 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대학 신입생들에게는 T페밀리 레스토랑을 데리고 가는 선배가 최고의 선배였다. 

 인기에 힘입어 영미산 페밀리레스토랑의 한국 대공습이 시작되었다. 시작은 역시 서울 부터다. 멍청이 빵을 무제한으로 줘서 대식가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호주산 스테이크 페밀리레스토랑, 아일랜드 컨셉이나 결국 미국 회사였고, 왠지 호주산 레스토랑 보다는 더 청결해 보여서 내가 좋아라 했던 붸리붸리 페밀리레스토랑 등이 서울의 주요 상권에 대거 출현하였다. 평범한 소득 계층에게는 '비싼 식사=영미권 페밀리 레스토랑'의 공식이 성립되었고, 조금 더 구매력이 좋은 직장인은 미친마늘로 가는 양상이 나타났다. 물론 이런 페밀리레스토랑은 20~30대 타겟층의 소박한 사치를 위한 공간이었지만, 서울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서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서울에서 제대로된 스파게티를 먹을 수 있는 곳이 광화문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since1994 광화문 뽀모도로. 2001년 진짜 스파게티는 광화문에 있는 바로 그 집에서 판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당시에는 진정 스파게티의 신세계를 맛봤다. 스파게티라는 이데아의 음식은 피자, 햄버거, 치킨과 함께 맛난 4대 서양 음식이었지만, 다른 세가지 매뉴와는 다르게 실제로 먹게되는 스파게티는 시뻘건 토마토 소스에 고깃가루와 차갑게 불어 있는 국수 면빨을 말아 놓은 것이 현실이었다. 이랬던 스파게티가 따뜻하고 맛난 단품 식사로서의 스파게티로 바뀌는 순간을 since1994 뽀모도로에서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릴에 굽거나 오븐 굽거나 기름에 튀긴 서양 음식은 앞서 나열했던 페밀리 레스토랑 아니면 패스트 푸드 혹은 피자전문점에 찾을 수 있었는데, 이런 곳들의 맛이란 것이 거의 비슷한 것이 현실이었다. 아니, 같은 프랜차이저에서 맛이 다르다는 것이 더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던 와중에 이 뽀모도로라는 곳은 미래에 서울에서 벌어질 서양 음식의 다양성의 작은 공 같은 것이었다. 


"-_-"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프랜차이저가 모든 소매 분야에서 모든 점포들을 집어 삼킬것 만 같았다. 유통 영역은 사실상 대형 마트와 편의점의 시장점령이 이쯤해서 판정승을 얻은 상태였다. 판정승이라 시장에서 계속 경쟁을 시키면 한쪽이 사라질 것이란 이야기. 그래서 '대형마트 의무휴업'이 법재화 되지 않았던가. 이런 판정승이 아직 프랜차이저 음식점에는 적용되지 않았는데, 당시 프렌차이저의 기세는 외식업계 바닥도 곧 비슷하게 만들어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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