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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잡동사니/Books

by 금강력사 2010. 9. 27.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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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장 피에르 카르티에 등저/길잡이 늑대 역
예스24 | 애드온2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책은 기자와 피에르 라비의 나무에 대한 대화로 책의 첫 장을 연다. 누군가 영화의 처음 10분에 영화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했던가? 이는 영화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의 10분은 책의 첫 장과 비교가 가능하겠다. 피에르는 나무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한다. 대지와 하나가 된 나무의 생명은 대지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나무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연이다. 이를 인간이 인위적으로 컨트롤 하려 할 때, 대지 위의 모든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청소년 시절을 보낸 공동묘지 아래 숲속 집에서 나는 나무의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사실 자주 들었다. 실제로 경험한 이야기이고, 실제로 나무는 많은 소리를 낸다. 나는 사계절 나무에 반응했었고, 덕유산, 감악산 자락을 보면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느꼈고, 지리산을 보며 경외심을 가졌다.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늘 산 뒤에 산, 그 뒤에 다시 산이었다. 제도권의 교육을 받으면서 어느새 나는 서울 사람이 되었고, 이곳에서 내가 나무의 소리를 들었다고 말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농담이나 시적 표현으로 생각한다. 가끔 나의 주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피에르는 아프리카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자랐다. 그리고 다시 아프리카를 위해 일하는데 그의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자란 피에르는 다시 오아시스로 돌아간다. 피에르가 사막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묘사한 장면이 있다. 이는 그의 다른 저서인 ‘황혼에 바침’이라는 책에 잘 묘사되어 있는데, 인간을 침묵하게 만드는 사막의 광대함, 사막의 궁극적 영원에 대해서 말한다. 변혁의 시대에 프랑스 도시를 살아간 피에르가 시골의 삶으로 돌아온 것은 어쩌면 필연적일 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그를 지지하는 그의 동반자도 있었기에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피에르는 황무지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한다. 처음 그가 농사를 선택했을 때, 자본주의 시스템이 철저하게 파고든 시골의 환경에 아연실색 하고 만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귀농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농사를 짓겠다는 것은 그 역시 시장경제 체제의 끊임없는 경쟁과 답이 없는 일상에서 벗어남의 상징이다. 하지만 그곳에도 자본주의 논리는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마치 그것이 진리인양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최소한의 소득이라는 결과로 몰아넣는다.

 

많은 농부들이 그 원리에 쓰러졌지만, 피에르는 그렇지 않았다. 어쩌면 교육받은 자의 특권이자 역할인지도 모르겠다. 지식인의 책무라고 해야 할까? 그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부터 철저하게 파고들었다. 자본주의적인 생산량 중심의 농업과 그를 위한 화학비료 생산. 그리고 필연적인 토지의 파괴. 다시 시작되는 시장경제의 끝이 없는 경쟁. 세계화. 이는 결국 농부들을 다시 가난하게 만들고, 그들을 다시 도시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피에르는 이 모든 것을 파악하였다.

그는 이에 대항하기위한 투쟁을 시작한다. 처음 그의 투쟁은 작고 소박한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도 작고 소박한 투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생화학 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는 농업을 시작한다. 퇴비를 만들고 작은 저수지를 자신의 손으로 만든다. 사막화가 진행되는 땅에 나무를 심는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토종 종자를 심는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유기농 농산품을 만드는 활동이 아니라, 농민들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활동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고, 그 자급자족을 통한 풍요를 누리게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농민들은 화학비료를 동원한 엄청난 수확량에도 전혀 즐겁지 않았고, 전혀 풍요롭지 않았다. 그들의 손에는 결국 빈곤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피에르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최소한 그가 활동한 자리에서 만큼은 땅의 생기를 불어넣고, 농민들의 삶에 풍요를 돌려준다.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그리고 세계화. 이 세 개의 단어는 정말이지 파괴적이고 악독한 단어들이다. 서구문명은 그리고 그 서구문명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많은 지식인들, 그리고 그 와중에 스스로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은 세 개의 단어에 열광하고 그것을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자본주의 적인 잣대로 그들을 평가했고, 자본주의적인 방법으로 아프리카에 진출하는 것을 꿈꿔왔다. 어쩌면 이미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은 이런 영향으로 파괴되었고, 오늘도 파괴되고 있다. 한국의 높은 자살률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금융 위기를 탈출한 한국 경제와 무관하지 않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 아프리카에서 돈이 가장 많은 도시. 남아공 요하네스버그는 슬럼화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도시이다. 나의 경험상 도심을 동양인이나 흑인 맨손으로 걸어다는 것은 날 잡아 잡수라고 부탁하는 일이다. 이런 도심 슬럼화는 다름 아닌 도시로 몰려든 수많은 이주자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아프리카 흑인에게 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이아와 황금을 찾아서 죠벅(요하네스버그)으로 갔다고. 하지만 그곳에는 단지 회색 건물들이 이었고, 그들은 남의 주머니에서 다이아를 찾고 있다. 이는 아프리카의 자본주의화에서 시작된 일이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파괴적인 시장경제 앞에 더 이상 자신들의 고향에서 살수 없었고, 도시로 몰려든 것이다. 나이지리아에서 이디오피아에서 짐바브웨에서 몰려들었다. 원래 아프리카 인들은 도심에서 비참하게 살면서 남의 목숨을 위협하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피에르는 소비가 이 경제를 유지해 준다는 말에 분노한다. 분노에 그치지 않고 이에 맞서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 중 그가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은 전 세계를 떠돌며 하는 연설이 아니다. 그는 본질적인 행복을 찾는 것에 최선을 다 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본질적인 행복을 가장 실천적인 첫 번째 걸음인 땅에 생명을 찾아주는 농사를 짓는 것에서 찾고 있다.

서구인들로 시작되어 거의 인간세계 대부분의 부를 점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고, 소위 말하는 부자가 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피에르의 기준에서는 그리고 그의 지지자중 하나인 나의 입장에서는 진정 합리적인 것은 지금 당장 파괴적인 생산과 소비를 멈추고 서로를 존중하며, 실제로 상대를 약탈하는 일과 간접적으로 누군가에 박탈감을 안겨주는 일을 멈추는 것이다. 인간을 지배하는 합리적인 컴퓨터나 인공지능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보면 늘 인간들을 그들의 완전한 통제아래 두려고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다는 컴퓨터 같은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서 말이다. 이런 비인간적인 결론을 맞이하기 전 우리 스스로 진정 합리적인 길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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