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스24 | 애드온2 |
소유나 삶이냐
“소유냐 삶이냐” 1976년도에 간행된 ‘에리히 프롬’의 저서이다. 산업사회가 고도화 되어 가는 시점에 인간의 삶의 의미에 대해서 혹은 인간의 존재에 관해서 그리고 사회에 관해서 관찰하며 선배들의 학문을 재해석해 보고 동시 인류역사의 대표적인 가르침 즉, 종교들의 입장을 고찰한 후에 저자가 이 책을 집필했었던 만큼, 이 책을 읽고 이해 한다는 것은 간단하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언어학부터 철학, 신학, 심리학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접근 방향과 철저한 각 영역들의 고증과 해석을 통해 그의 의견을 펼쳐놓는 분석적인 전계방식은 사전지식이 부족하다면 더더욱 복잡해만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이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의 삶의 철학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비록 30년도 전에 집필된 책이지만, 30분당 한명씩 자살, 자살률 세계 1위 국가, 현재 한국의 사회인에게는 시대적으로 적절한 책이라는 생각이다. 고도화된 산업사회와 한국의 높은 자살률을 같은 선상에 놓고 인과관계나 연관관계를 따진다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 심한 듯하지만, 자살이라는 현상을 대할 때 삶에 대한 고민이라는 측면과 ‘에리히프롬’이 사회적 병폐에 따른 인간의 삶에 대한 철학을 다시 펼쳐 놓기 위함이라는 접근을 일반적 집필 의도라고 봤을 때, 이 책은 충분히 사회의 리더임을 자처하는 한국의 식자들에게 재조명 받아야 한다.
나에게 삶이란 어떤 것 인가? 그렇다면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취업 준비생으로서 흔히 철학적이라고 생각되는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 던지다 보면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그럴 듯한 단어인 자아성취가 떠오르지만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은 자아성취를 위한 길인가? 그렇다면 자아성취가 과연 내가 추구할 수 있는 올바른 방향인가? 즉, 삶의 방향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방식이 진정으로 궁극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인지 알기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돈을 많이 벌수 있을 것이야 라고 생각되는 방법은 많지만, 이렇게 하면 난 진정 행복할 것이야 라고 할 수 있는 방법은 늘 잠시 나를 망설이게 한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스스로 몰입과 성취라는 것에 빠져서 그것에서 잠깐의 행복을 맛보기도 하고, 계속되는 몰입과 성취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조금씩 더 힘든 목표를 설정해 가는 삶을 살아간다. 비단 나만의 삶의 방식인가? 현대를 살고 있는 스스로 성취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런 과정들을 거쳐 왔을 것이다.
우리가 행복을 모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나에게 주어진 자유라고 생각되는 것을 누리는 것이다. 흔히들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 이를 저자는 시간을 죽인다로 표현했는데 다시 말해, 일정 시간을 낭비함으로서 그곳에서 행복감을 맛보기도 한다. 주말에 필요이상의 잠을 잔다든지 하는 행위로 설명이 가능 할 것이다.
목표의 달성과 그 과정의 몰입. 그리고 시간을 낭비하면서 얻는 행복감들이 우리에게 허락된 진정한 행복의 전부일까? 나는 나의 삶에 초점을 맞춰 감으로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답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에리히 프롬은 책에서 존재, 삶(to be, being mode)과 소유(to have, have mode)라는 두 추상적인 단의 대립 구조와 시대에 따른 변화 구조를 통해 우리의 알 수 없는 불만족의 이유를 살펴본다. 소비로 대표되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결코 과거의 철학적 선배들과 선각자들 종교들이 말하는 행복한 삶이 아니었다. 이는 현대에 끔찍하게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행복도가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것에서 객관적인 사실로도 확인이 된다.
프롬은 소유함으로서 행복을 얻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존재라는 단어를 통해 철학적인 해답을 얻어간다. 존재라는 단어는 책에서 그 단어 자체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행위, 생각, 경험 등을 소유로 인식하느냐 아니면 그것 자체로 받아들이는가는 철저하게 다른 삶의 철학과 형태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한글은 다행이 have. 즉, 소유의 의미보다는 다양한 동사들이 자유롭게 쓰이고 있지만, 서구 문화 특히 현재 가장 큰 부를 누리고 있는 영미권 국가의 영어 문화는 have, take, get이 라는 소유를 지칭하는 단어들의 사용빈도는 일상에서 다른 모든 단어를 합친 것만큼 많다. 거기에 make라는 단어에 생산 후의 소유라는 개념을 떠올려 본다면 이는 더욱 심각해진다.
잠시 한국인의 케이스를 생각해 보자. 한글이 한국인의 사고 기반을 잡고 있지만, 일제와 독제시대를 거치면서 소유의 추구를 병적으로 갈망해 왔고, 더 나아가 많은 역사적 수탈을 통해 거친 지독한 굶주림은 우리민족에게 서구인 못지않은 소유욕을 가지게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소유하지 못하면 존재도 없었던 역사를 한민족은 살아왔었다.
책에서 계속해서 존재양식을 안정-불안정, 연대-적의, 기쁨-쾌락 등등의 두 가지 대비되는 개념을 통해 풀어나간다. 특히, 능동성에 관한 고찰은 독창적인 접근과 저자의 놀라운 안목을 보여준다. 능동성에 대해 소외되지 않은 능동이라는 개념(추후 생산적 능동(productive activity))으로 결론을 진정한 능동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또 그 고찰이 삶의 양식과 행복한 삶에 까지 투영이 될 때, 그 놀라움은 불자가 명상 후 얻는 맑은 정신에 비유할 만 할 것이다. “생산적인 사람들은 그들이 접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즉, 생산 활동을 단순히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활동으로 두지 않고, 인간에 있어서 능동적인 생산 활동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본질적 정서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한 가지 슬픈 것은 산업사회 이전에는 인류에게 능동성의 의미는 진정한 자유인들이 하는 대부분의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우리 현대 사회의 능동성이 얼마만큼 정서적이고 인간적인 생산 활동을 지칭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스피노자는 이를 선과 악의 개념까지 이끌어 갔는데, 올바른 의미의 능동성은 ‘선’으로 보고 있다. 철학적 심리학적 경로를 생략하고 탐욕, 야망으로 표출되는 능동적 정서가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간단한 현상만으로 봤을 때에도 산업사회의 단순히 분주하기만한 능동성은 ‘악’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때 ‘특정인이 특정 행동을 하게 된 의도와 동기가 탐욕적인 것이라면(특히 정치적으로), 그것은 악한 것’라는 입장을 고수 했었던 나는 스피노자를 나의 철학적 선배로 부르고 싶다.
저자는 고맙게도 이 책을 분석과 고찰에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핵심은 ‘인식’이라는 개념인데 이는 서구 철학의 대표주자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연장선상으로 봐도 되겠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먼저 파악한다면 진정으로 행복을 추구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안목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도 열리게 될 것이다.
프롬은 동시에 마치 정치가들(진정한 의미의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는 정치가)처럼 구체적인 방법까지 열거한다. 미안하지만 그의 열거는 30년이 지난 현시대에는 이루어지지 않고, 더 심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 가지만 예를 들면<기업광고와 정치적 선전에 있어서 모든 세뇌적인 방법은 금지되어야 한다.>라는 방안. 물론 1차 대전에서부터 냉전의 시대보다 국가적인 세뇌는 줄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기업광고가 이를 대체하고 있지 않은가? 단순히 기업광고가 기업에 대한 것이라고 보지 않고, 현대인의 소비 양식을 보면 이는 분명해진다. 끊임없이 필요를 세뇌시키고 있고 사람들은 자신이 필요하다고 착각하며 소비를 한다. 이는 어쩌면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기에 더 과거 파스즘적인 세뇌보다 더 위험 할 수도 있다.
책은 끝머리에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결국 앞서 말했듯 ‘인식’의 문제인데 사람들이 얼마나 개인적인 인식의 폭이 크고 많은 사람들이 인식을 시작하느냐가 문제가 될 것이다. 동시에 사회체제에 대한 불만의 표시를 프롬은 말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이런 불만의 표시는 5라운드 판정패를 당한 상태다. 2번의 세계대전과 한국전, 베트남 전 이후 국가나 권력에 의한 욕망과 소비의 재생산은 없을 것을 기대했지만, 외환위기, 그리고 이번 금융위기를 통해 소비적 경제체제는 더욱 튼튼해졌고, 사람들은 더욱 순종적이 되었다. 오히려 전쟁을 통한 사회체제의 유지보다 더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판단된다.
희망을 걸었던 오바마 대통령도 미국 사회의 유지에 중점을 두고 1등을 강조하는 있는 마당에 소유를 강조하는 사회적 흐름은 좀처럼 멈출 것 같지 않다. 그나마 긍정적인 측면은 사회 조직을 유지하고자 하는 종교의 역할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체제 유지를 위한 맹목적인 종교 활동은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이는 다양성 발달 가능성의 측면에서 상당히 고무적이다. 어쩌면 프롬이 이야기 하는 르네상스 이래의 합리적인 사고 및 발달된 과학과의 종합 선물세트가 다시 도래할 신호일지도 모르겠다.
현재 많은 도전자들의 변화에 대한 노력이 다양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만큼 그들의 사회체재 수성은 더욱 단단해져 간다. 그 외에도 프롬은 이간 자체적인 변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진정 그가 제시한 변화의 가능성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하지만 지금 나의 눈에는 터미네이터와 메트릭스가 보인다.
역사비평 2010 가을 (0) | 2010.10.29 |
---|---|
철학 에세이 (0) | 2010.10.18 |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1) | 2010.09.27 |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0) | 2010.09.23 |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0) | 2010.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