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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계간) : 92호 2010 가을
역사문제연구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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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대학의 붕괴
역사비평 2010년 가을 호의 대 주제는 특집‘대학의 붕괴’이다. 현재 대학가에 일어나고 있는 총체적인 현상을 ‘대학의 붕괴’라는 말로 다루고 있다. 그 외 기획, 특별연구, 역비논단, 역사의 창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 비중이 특집에 비해 낮으므로 2010년 역사 비평 가을 호에 대한 서평은 ‘대학의 붕괴’에 관해서만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우선 대학가의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집고 넘어가고 싶다. 역사비평의 기본적인 색은 몰라도 짐작 할 수 있을 만큼 좌파적이다. 굳이 좌파적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개인적인 이유인데, 최근 진보의 개념에 관해서 지금 혼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기업화에 반대하고 세계화에 반대하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기본적인 입장의 배경을 가지고 역사비평은 대학을 비평한다.
이번에는 독후감 형식의 서평이 아닌, 역사비평의 글들이 했던 방식대로 나 역시 대학가 진단을 시도해 보고 현상을 바라보는 나의 입장을 역시비평과 비교하며 써 보려 한다.
최근 대학가 내의 가장 큰 이슈는 없다고 봐야하는 것이 내 입장이다. 대학가의 이슈는 사라졌고, 각자의 목소리를 내기를 시도하는 정도이다. 국내 K대를 다니는 본인에게 김예슬이라는 동문이 내걸었던 대자보는 역사비평에서 혹은 다른 여타 언론에서 다루는 것만큼 큰 화두가 아니었다. 대자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심히 읽어봤고 입장에 대한 이해도 시도 해 봤기에 무관심에서 오는 평가는 아니었음을 분명히 한다. 임의적으로 좌, 우 성향으로 언론을 나눈 후에 김예슬씨의 자퇴를 바라보는 시각을 일반화 시켜 보면 시대에 대한 비판과 개인에 대한 비판으로 압축할 수 있다.
우선 시대에 대한 비판은 역사비평에서 써 내려가는 바로 그런 것들이다. 자본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세계화가 가속화 되고, 그 속에서 경쟁이 치열해 진다. 그리고 그 영향은 한국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게 되고 그 현상 중에 대학 교육의 기업화도 포함 되는 것이다. 이런 분석은 좌파적인 시각에서 오는 분석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로 받아 들여야 한다. 경제학에서 수학의 공식처럼 일반화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가격을 결정하는 것처럼 시장경제와 세계화의 법칙은 경쟁사회와 대학의 기업화를 조장하게 된다. 이를 거꾸로 뒤집어 보면 대학가의 변화는 결국 자본주의 비판으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개인에 대한 비판은 주요 언론사들의 입장이 아닌 개별적인 소리가 많았다. 심지어 조, 중, 동으로 대표 되는 보수 언론에서 조차 김예슬씨 이야기를 다룰 때는 대학가의 흐름의 변화를 많이 다루었다는 것과 어느 정도 비교되는 측면이다. 물론 주요 언론사에는 개별적인 소리 역시 기사화 되고 현 시대를 바라보는 하나의 현장이었지만 한 잘나가는 경영대생의 자퇴만을 놓고 봤을 때, 개별적인 소리 역시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들 소리는 두 갈래로 나누어 졌는데 결국 다른 길을 가는 전략적 선택이 아니냐는 것과 경쟁에서 밀리는 자의 엄살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 김예슬씨가 대자보를 붙인 그 다음날 불편한 심경을 담은 대자보가 잇따랐는데 이들 대자보의 특징은 한 개인의 선택을 자신의 관점에 바라보고 개인의 행동 자체를 비판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안타까운 것은 김예슬씨의 자퇴가 이슈화 되는 배경에 대학가 개인의 소외문제 혹은 조금 더 적나라하게 말해서 소위 매인스트림을 따르지 않은 개인의 선택을 특별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 김예슬씨 본인의 행동에도 나타는데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과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학의 잘못을 비판하는 내용이 주인 대자보를 내 걸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행동은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며, 거기서 나아가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며 소위 능동적인 선택을 하지 못하는 타인들에 대한 공격도 포함되어 있다. 결국 이에 대한 반발로 개인적인 비판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왜 자퇴하는 한 사람이 대자보를 내걸어야 하며, 왜 그 것이 이슈가 되어야 하고, 왜 누군가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을 방어해야 하는가? 이 몇 개에 대한 질문들을 답하다 보면 현재 누군가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학의 현상에 답변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정말 ‘대학이 붕괴’했는가에 관한 답변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왜 그녀는 대자보를 썼을까?
이 질문의 답은 대자보를 쓴 본인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빠르겠지만, 대자보의 내용들을 되짚어보며 그 이유를 추측해 보자.
그전에 ‘다른 자퇴자들은 왜 대자보를 쓰지 않았을까?’에 대한 답을 구해 본다. 지금 당장 내 머리에 떠오르는 대표 자퇴자는 빌게이츠, 스티븐 잡스와 나 자신이 있다. 우선 나를 관찰해 봤을 때, 내가 자퇴를 결정할 당시 선택의 이유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타 대학 진학을 위한 선택이었다. 누구나 납득하기 쉬운 선택이었기 때문에 굳이 나 자신을 정당화 시킬 필요가 없었다. 또한 전 대학에 대한 불만 사항을 나열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 나는 그 대학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갈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특별한 케이스인 빌게이츠와 스티븐 잡스를 보자. 이 둘 역시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길이 확실했기에 그리고 그 선택 이후에 올 결과들이 대학 졸업장과 비교하기 힘든 것들이었기 때문에 대자보를 붙일 이유가 없었다. 정리하자면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김예슬의 대자보에서 보이는 몇 개의 키워드를 간추려 보겠다. 빛나거나, 빚내거나, 불안과 좌절감, 취업, 경쟁, 적, 부품, 자격증, 상품, 싸움 등. 그리도 마지막에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라는 문장까지. 우발적이거나 충동적이지 않았다고 충분히 양보를 하고 보더라도 그녀가 선택했던 자퇴에는 여전히 경쟁과 현실이라는 것에 대한 집착이 나타난다. (대자보 원문을 참조하기 바람) 대자보를 하나의 단어로 나타내자면 ‘경쟁’이다. 나는 감히 대자보를 쓴 이유를 또 하나의 경쟁이라고 본다. 대자보를 씀으로서 특별한 경쟁상황이 또 다시 연출 되는 것이다. 내부 경쟁에서 이탈하거나 (본인) 경쟁에서 초월한 (빌게이츠, 잡스) 사람은 대자보를 쓸 필요가 없다.
대자보를 쓴 이유는 경쟁 상황에서 또 다른 경쟁상황으로 들어가는 한 도전자가 자신은 본인 같은 경쟁 이탈자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를 통해 대학을 보도록 하자. 결국 대학의 가장 큰 고민은 경쟁이고 그 경쟁의 (무)의미에 대해서 다수의 대학생들은 고민이 없다. 어느덧 김영삼 정권 때부터 외쳐 오던 무한 경쟁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되었고, 이는 대학에서도 당연한 것이 되었다. 경쟁에 대한 고민마저도 경쟁으로 승화되는 것이 이 대학가의 현실인 것이다. 경쟁을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도 없고, 인정받지도 못할 것 같은 우리의 의식은 적으로 삼고 싶어 하는 그들에게 이미 패배해 있다. 나는 여기서 대학생과 대학가의 상생에 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상생을 말할 때도 이미 경쟁에 대한 대안이라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이 역시 경쟁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개념을 내세울 자리는 아니지만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덧 붙여 본다. 대학 내 경쟁에서 초탈이야 말로 진정한 대안이자 답이다. 특히나 대학생은 경쟁에서 초탈 할 수 있는 신분이다. 초탈하면 빌게이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댓값의 개념에 보았을 때, 경쟁을 거부하는 인생이나 경쟁에 포함된 인생이나 경쟁에 포함된 인생이나 비슷하다. 경쟁 속에 잘난 직장에서 들어가서 평생 월급 받을 확률은 높아도 만족도가 엄청나게 떨어지기 때문에 낙타 바늘구멍의 확률이라도 잡스가 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기댓값은 더 높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대학생이 경쟁에 초탈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경쟁 속에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 차체가 이미 기업 논리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대자보를 쓴 것은 대학가의 경쟁 때문이고, 그 경쟁에 고민하는 자들도 경쟁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대학은 경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2. 왜 그녀의 대자보가 이슈화 되었나?
앞서서도 이야기 했지만, 개인적으로 그 일이 나에게는 큰 이슈가 되지 못했다. 내 삶의 화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내용일뿐더러 아무런 개인적으로 새로운 도전이나 진일보한 삶의 방식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를 이슈화 했었고, 지금까지도 ‘대학의 붕괴’라는 말을 인용할 때, ‘88만원 세대’와 함께 회자되고 있는 사건이다.
김예슬씨의 개인적인 고민은 백번 이해하고도 남지만, 그녀의 행동이 정작 나를 포함한 대학생들에게는 개인적인 선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회는 이를 이슈화 하고, 그녀의 행동에 대한 다른 대학생들의 개인적인 반응에도 관심을 보였다. 이를 사회적 현상으로 보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나는 이를 시대의 변화에서 이유를 찾고 싶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좌든 우든 주류사회에서 메인스트림 글을 써 내려 가는 사람들은-대학이 큰 고민이었던 시절-그들 시대의 대학을 다녔다.(굳이 더 많은 설명을 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들에게 현재 대학은 생소한 곳이다. 대학생들이 고등학생들 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사회에서 부여하는 대학의 계급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 내부의 인들의 성공에 대한 관심이나 기대가 높아진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각각 주자가 되어 레이스를 펼쳐나가는 모습은 소위 어른들에게 너무나도 생소하다. 그렇다면 각개전투라는 말이 나오게 되고, 요즘 학생들은 사회에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언론이 정말 관심이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대학가의 흐름인가? 아니면 그들과 다른 현 대학생들의 모습인가? ‘대학의 붕괴’라는 말을 봤을 때 이는 지금의 대학가가 잘못되었다고 보는 그들과 다른 현재 대학생들의 모습에 진정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닌가한다.
대학가는 자본주의화 되었고, 심지어 자본의 논리에 완벽하게 편승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논리 속에 살아가는 인간세계에 왜 대학생들만이 자본주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 다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현 대학. 큰 배움이 없다고 하는 대학, 경쟁만 한다는 대학을 다니면서 그 대학의 경쟁을 거부하고, 요구하는 학점을 거부 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거부 하는 하나의 행동으로 연결된다. 물론 이가 개인적인 선택에 따른 결과였을 때. 그런데 대학생이나 사회인이나 똑같은 입장에서 시장에서 입지를 다지는 행위가 자신의 생계가 걸려 있는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면, 왜 대학생만이 기업화, 서열화, 지성의 몰락에 대한 책임을 추궁 받아야 하는가?
김예슬씨의 대자보를 메이저 언론에서 집중 조명했던 이유에는 그들의 대학생활에 대한 향수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고 판단된다. 대학교는 지성의 산실이었고, 한국의 주류문화를 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도 그러한가? 어쩌면 대학생의 수준이 예전 보다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한국 문화의 주류 레벨이 올라 간 것이다. 마치 한국의 프로농구가 출범하며 과거 실업팀과 대학팀간의 격차가 없었던 농구 대잔치와 레벨이 다른 전력들이 완성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결국 언론과 논객들이 대학생의 역할에 대한 기대와 그 수행의 여부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무렵 소위 명문대의 학생이 분노에 가득 찬 선택을 했고, 인과적으로 사회적 측면에서 대학생의 무능함을 논할 수밖에 없었기에 더욱 더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대학의 붕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즉, 현재 경쟁이 강조 되고, 취업과 서열화가 일반적인 대학가의 현실을 실패로 본다면. 이는 분명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시스템 속에 대학의 역할이 왜곡 된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편승해서 살아가는 기성세대가 그들 보다 더 많이 자본주의의 현실에 허덕이는 대학생에게 단지 그들이 대학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학 붕괴의 책임을 떠넘기려 하는 것은 그야말로 ‘88만원 시대’에서 지적한 젊은이를 노예화 시키는 기성세대의 모습이다.
결론적으로 말하건대, 그녀의 대자보가 주류에 주목받은 이유는 이러하다. 예슬씨의 대자보는 현재 ‘대학의 붕괴’라고 평가되는 현상의 아이콘으로서 대학생들의 실상, 대학생들 간의 갈등, 대학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단적이 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의 붕괴’는 어디까지나 대학생과 대학의 몫으로 남겨두려 하는 친절한 주류 사회의 배려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생 보다 훨씬 더 지적이고 열정적이고 월급을 많이 받는 혹은 다양한 방법으로 가치를 창출하는 사회인들의 행동하지 않는 대학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 때문이다.
3. 왜 자신을 방어하는 현상이 생기는 가?
예슬씨의 대자보가 붙고 바로 그 다음날 같은 자리인지 옆자리였는지, 그녀의 행동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붙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잘 나지 않고,(더군다나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관계로 웹서핑으로 그 내용을 찾아 볼 수도 없지만) 어쨌든 두 번째 대자보의 주 내용을 읽으며 받은 나의 나낌은 변명과 자기방어였다.
도대체 무엇에 대한 변명이며, 누구로부터 자기를 방어하는 것인가?
반박 대자보는 그녀를 자퇴하게 방치한 지신의 행동에 대한 변명이었으며, 떠나는 자퇴생의 분노의 공격으로 부터의 자기 방어였다. 앞서 2번 소주제에서는 대학생의 책임문제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관점을 비틀어 봤지만, 어쨌든, ‘반박 대자보’의 주인공은 스스로 대학 현상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다른 글들을 봤을 때, 경쟁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두 번째 대자보의 기업적인 논리와 ‘또 다른 스펙 쌓기 아니냐?’ 고 비난 했던 수많은 반응의 주인공들도 무언가 대학가의 기조가 잘못됐다는 데에 동의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을 여기서 발견 할 수가 있다. 대학에서 벌어지는 시장경제 자본주의적인 일들에 대해 많은 대학생들이 종교적 신념 수준으로 동조하고 있는 가운데에도(동조하고 있다는 근거는 기업과 시장이 원하는 상품 형태로 본인을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대학 몇 년을 바친다는데 있다.) 자신들이 대학의 롤을 잘못 만들어 가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공존하는 것이다.
결국, 개인적 반박의 주요 원인은 예슬씨의 대자보 내용이나, 논리 치명적인 논리의 오류가 있다거나 모두가 동조할만한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선택에 느끼는 불편함이 주요 원인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 불편함을 분석함으로서 대학생 혹은 대학가의 롤에 대한 망연한 우리의 기대를 엿보겠다. 간단히, 대학생은 자유로워야 한다. 대학생은 시대정신이 충만해야 한다. 대학에서는 진정한(??) 학문을 탐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고액 연봉자 되어야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이 모든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대학생은 죽기 살기로 달리고 있고, 결국 죽기도 하고, 자퇴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현실이다. 자유롭게 살고도 고액 연봉자가 되어야 하다니. 시대정신이 충만하고, 자본주의에서 고액연봉자가 되어야 하다니. 어떤 기준에서 진정한 학문을 추구하고, 기업이 원하는 인재가 되어야 하다니. 결국 대학생들이 생계문제에 직면하게 되면서 대학가는 누군가가 기대하는 형태를 유지하기에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다양한 케이스가 있겠지만 이를 일반화 시켜 봤을 때, 생계문제를 걱정하는,(비약이 심하다면)고액연봉자를 꿈꾸는 대학생이라면 누군가가 기대하는 대학생의 그런 모습을 살 수는 없다. 결국 예슬씨나 그녀에게 불평하는 다른 학생들이나 대학생활에서 느끼는 것은 똑같고, 선택의 기준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주제에서 벗어났지만, 여기서 나의 불평을 조금 덧붙이자면. 나 스스로 방어를 하기 위해 누군가를 공격해 보자면. 대학가의 이상적 롤을 실현 시키는데 절대 불가능 한 사회를 만들어 놓고, 대학생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기성세대의 기만적인 행태에 웃음이 날 뿐이다. 누가 대학 지성이 몰락했다고 할 수 있나? 대학생들은 자기 스스로 학문을 쌓아 나갈 만큼 수준 높은 지성인이 되어있다. 흐름에 휩쓸려 욕구가 이끄는 데로 대학시절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회인이 되어 무책임한 투표를 난발하는 세대와는 다르다. 이런 나의 공격형 방어 논리가 대학생들의 삶의 선택에 조금이나마 자신감을 불어 넣을 수 있었으면 한다.
결론
대학가의 롤은 변했다. 최소한 한국의 대학은 급변하는 사회 그 이상 변화하였다. 대학가가 기업이 원하는 인제 양성소가 되었다고 비판하지 말자. 이는 지각활동을 무시한 체 화산 구멍을 막으려는 시도와 같다.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루어서 완전한 고용 시장을 만들 필요는 없더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개인의 행복을 추구 하는 사회적 기반은 마련이 되는 것이 먼저다. 고소득층이 되지 못한 계층이 패배 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기조가 결국 대학가를 10여년 만에 변화 시킨 것이지, 우리의 적은 단지 거들기만 했을 뿐이다.
‘대학의 붕괴’라는 말은 현 시점에 쓰기에는 이르다. 혹은 어울리지 않는다. 기업화, 서열화는 사실일지 모르지만 지성의 몰락은 사실이 아니며, 설령 기업화 되었고, 서열화 되었더라도 꾸준히 대학들은 학문의 기관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돈벌이만 추구하는 학문의 수요가 그만큼 는 반면에 이탈자도 많아지고 있으며 의미 없는 행동이 아니라 지성의 발달을 통한 기업화에 대한 대안 역시 나오고 있다. 이런 식의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 질 때, 근대 산업사회 말미에 마르크스가 태동하지 않았던가? ‘인문학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불안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인문학은 처음부터 돈이 되는 학문이 아니다. 인문학을 물적인 기준으로 평가를 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인문학은 죽은 학문이다. 이는 유일신을 믿는 다고 하며 종교전쟁을 벌이는 종교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학의 서열화는 제도와 구조적인 문제이지 대학의 붕괴나 위기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물론 단과대가 강조된 대학의 성격이 퇴색되어 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학은 자신만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자신만의 특성을 확보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만약 서열화 되지 않고, 대학 간의 경쟁이 없었더라면 아무의미 없는 미안하지만 내 기준에서 사회적 가치가 전혀 없는 대학들이 버젓이 불쌍한 학생들의 등록금을 빨아먹고 있을 것이다. 이는 경쟁사회의 장점으로 봐도 되겠다. 단지 제도적으로 대학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지 못했다는 것과 구조적으로 잘나가는 대학이 더 잘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구조와 제도를 개선함으로서 서열화가 무의미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의 대학생은 최고의 지성집단이 아니다. 최소한 학부생 수준에서는 절대 아니다. 7~80년대에는 감히 대학생이 최고의 지식 집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지식 집단은 많이 이동한 상태이다. 이는 한국의 사회 구조가 나름 서구 선진국화 되었다고 평가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식인이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한다고 봤을 때, 비판 받아야 할 계층은 대학생이 아니다 라는 결론이 나온다. 긴 말 필요 없이 한국의 지식인 계층은 정말이지 이기적이다.
나의 글이 다소 냉소적이고, 무기력 하게 느껴 질 수도 있겠지만, 현실을 받아들이자는 것이 아니다. 아직 나의 글이 숨은 의도를 파악해 달라고 하기엔 한참 모자라기 때문에 나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겠다. 진정한 의미의 대학문화와 엘리트를 키워 내려면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가 우선이지 무엇은 이래야 한다는 기존의 틀에 박힌 시각으로 무언가를 평가하려 해서는 안 된다. 왼쪽 성향의 집단에서 끔찍이도 실어하는 미국 사회는 다양성 하나 만큼은 존중이 되는데, 이는 대학가에서 가장 우선시 되는 가치이며, 미국 명문 대학들을 운영하는 기본 원리가 되고 있다. 하버드, 스텐포드 기타 등등 미 명문 학군들은 다양성을 기초로 학생을 선발한다. 그리고 그 학생들이 자신들의 색을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배려한다. 이미 고액 연봉자가 되든 안 되든 자신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이 되어 있다는 말이다.
‘대학의 붕괴’를 말하기 이전에 자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회인가 먼저 반문해 보아야 한다. 혹은 개인적으로 소유에 초탈하거나.